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외교적 해법을 제시하던 한국 정부의 노력에도 일본은 결국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문을 또 한 번 열었다. 국내에서는 불매운동이 한창이다. 여름 휴가철을 맞이했지만 일본여행을 취소한다는 이야기가 뜨겁다. 일본산 옷은 물론이고 자동차도 불매의 대상이다. 한편에선 불매운동의 무용론을 주장하지만 ‘일각’이다.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산 제품 구매를 꺼린다는 응답이 80%다. 우리에게, 세계 시장에서 불매는 어떤 의미일까. 특히, 자동차 불매는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
#1932년
일제강점기. 조선자동차연합회에서는 임시총회를 열었다. 주제는 ‘가솔린 가격 인상 반대’. 당시 우리나라에는 1900년대 초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석유가 활발하게 판매됐다. 초창기에는 미국의 텍사스 스탠다드가 고종으로부터 계약을 따내 저유소를 설립했다. 이후 일본이 값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자국산 석유에 미국 석유를 몰래 섞어 팔다가 난리가 나기도 했다. 1930년대는 좀 더 복잡했다. 텍사스 스탠다드에 이어 텍사코가 들어왔고 영국의 쉘 역시 국내에 들어왔다. 외국인들이 가져온 자동차에 주로 연료로 사용했고 식물 기름을 사용하던 등잔도 석유로 바뀌었다.
1932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선자동차연합회가 가솔린 가격 인상을 반대하며 ‘불매’를 선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34년에는 일제가 산업물자 통제와 함께 6개월분을 비축하는 석유업령을 공포했다. 1935년에는 조선석유를 세우고 원산에 정유공장도 설립했다. 모두 대륙침략을 위한 준비였다. 1932년 이후 석유 값은 계속 올랐다.
#1966년
민정당 백남훈 전 고문은 칼럼을 통해 정부의 일본차 토요타 코로나 도입을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당시 가장 보편적이던 새나라자동차가 빈약하기 때문에 외국 고급 승용차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나온 반발이다. 또, 미쓰비시의 콜트를 2530대 수입하면서 법을 개정해 면세 조치까지 취했다고 말했다. 미쓰비시의 콜트보다 토요타의 코로나가 500달러나 저렴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콜트를 수입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국회 재경위 질문에서도 김정렴 재무장관에게 신진공업이 콜트를 수입하면서 면세혜택을 받은 경위를 물었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이 차는 79%의 외산 부분품이고 완제품이 아니라 관세를 면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하고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조건으로 받은 대일청구권자금의 1차년도 실시계획을 발표하던 시절이다. 박정희 정권이 받은 총 8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위안부 보상 문제 때마다 나오는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정치인, 학생들에 대해 비상계엄을 발령하며 밀어붙였고 1966년 3월 한일 무역협정 조인, 5월 신진자동차 코로나 국산조립 인도식이 열렸다.
#1988년
미국의 캘리포니아 건포도협회가 우리나라의 수입건포도 관세율이 지나치게 높다며 한국산 자동차의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50%의 관세율을 50~70% 인하해달라는 요구사항이었다. 당시는 현대 엑셀에 이어 대우 르망, 기아 프라이드가 미국 시장 수출을 시작했다. 국내에는 1987년 7월을 기준으로 누적 등록대수 150만대를 넘어서 승용차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다만 미국의 1.4명당 1대꼴의 자동차 보유에 비해 우리나라는 28명에 1대꼴로 보유했으며 서독은 2.3명당 1대, 일본은 2.7명당 1대를 보유했었다.
#1992년
대만에서 한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대만에 진출했던 우리나라의 현대자동차도 불매운동의 대상이 됐다. 이유는 한중수교 때문이다. 대만중부 대중시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한국상품불매 서명을 했고 대만소비자연맹도 함께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대만의 대북시 여행사협회는 한국관광알선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독특한 것은 1992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한중수교 사실이 대만에 알 수 없는 경로로 정보가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만 정부의 정보 소스가 어디냐를 두고 우리나라 정부 내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졌다.
#1996년
미국 일리노이주의 미쓰비시 공장에서 성 학대 혐의와 관련해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가 주도하는 ‘오퍼레이션 푸시’가 미쓰비시 자동차를 불매하기로 선언했다. 1996년 5월 시작한 불매 운동은 1997년 1월 종료됐다.
미쓰비시 자동차는 소수민족 고용을 확대하고 성 차별 금지를 위해 2억 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불매운동을 종료시켰다.
#1997년
미국이 종합무역법 ‘슈퍼 301조’를 발동하면서 국내 소비자단체가 일제히 반발을 시작했다. 10개 단체가 반대캠페인을 열고 ‘미국의 행동은 교역질서를 힘으로 개편하려는 선전포고’라고 비판했다. 경실련 역시 성명을 통해 WTO에 제소하는 등 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은 WTO 탈퇴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보이며 압박을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미국산 제품의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자동차 협상으로 미국의 압박이 심해지는 과정에서 네브래스카산 쇠고기의 O-157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역전되는 듯했다. 하지만 슈퍼 301조에 이어 이듬해 IMF 구제금융까지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경제는 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나치의 역사, 독일차 불매운동은 왜 없을까?
역사적으로 자동차 불매운동은 국가 간 정치적인 입장, 경제적인 입장이 더해지며 발생했다. 특히,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행위로 인해 불매 운동은 힘을 얻었다. 세계 자동차 강대국인 독일. 과거 나치에 협조한 역사를 가진 회사들의 자동차는 왜 불매하지 않을까.
한겨레신문의 이완 기자는 그 이유를 메르세데스-벤츠의 박물관에서 찾았다. 이 기자는 “‘나치 부역’ 벤츠에 불매운동 없는 이유는?“이라는 2013년 9월 22일자 기사를 통해 벤츠의 박물관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역사를 솔직하게 기록하고 1988년 강제노동 희생자 및 가족에게 2000만 마르크를 지급한 과정이 모두 담겨있다고 전하며 1999년에는 벤츠, 폭스바겐, 알리안츠 등의 독일 대기업이 독일 정부의 중재 아래 100억 마르크에 달하는 강제노동 배상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런 이유로 불매운동이 없다고 전했다.
반면, 2012년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으로 일본 자동차는 불매의 대상이 됐다고 설명하며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토요타, 닛산 등 일본 자동차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덧붙였다.
오토캐스트=이다일 기자 auto@autocast.co.kr